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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세조 문충공계 > 소개 > 1세조
문충공계 연원
1세조
인맥
   

1세조(一世祖)

최군옥(崔群玉)의 후손들은 삼중대광의 벼슬에 오른 그를 시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는데 8세손인 만육(晩六) 최양(崔瀁)은 정몽주의 생질로 문하에서 사사하여 29세때 이성계와 합께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이부 상서 등 여러 관직을 거쳐 보문각 대제학에 올랐다. 그러나 고려 공민왕 4년(1392년) 에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죽자 버슬을 버리고 전북 진안군 팔봉산에 들어가 동굴에 3년간 은거 하시다가 전주 대승동 봉강리(現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신원리)로 내려와 은둔생활을 했다. 태조 이성계가 두 재상자리와 전록 800결을 주고 불렀으나 "충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며 따르지 않았다. 또한 만육 최양(崔瀁)이 갑진년(1424.세종6년)에 타게 하자 소식을 듣고 세종께서 또한 슬퍼하며 어찌할 줄 몰라 하시다가 삼일간 조회를 폐하고 고기를 먹지 않으시며 성복 하는 날에 승지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고 특령을 내려 만일 그 자손이 벼슬에 오르거든 어김없이 쓸것이며 그자손이 혹 살인한자가 있을지라도 악형을 주지 말고 군역의 폐를 당할 때에 그를 살피지 못한 관리에게는 형을 주고 징계하리라 하였다. 이러한 뜻으로 승지를 보내어 제문을 지어주며 가르되 학문도덕은 정이천 같고 절의청직은 엄광이와 같다 하였다.양은 선왕이신 태조대왕과 같이 아지발도와 싸울 때 종사관으로 공을 세웠거늘어찌 최양 을 잊을소냐! 이 책의 견고함이 금석 같은 고로 책이름을 금감록(金鑑錄)이라 하였다. 나는 자손에게 전하기를 이씨가 영원히 살 때까지 잊지 않을 뜻으로 장서각에 비치하고 한 권을 그 아들에게 내주었다. 이와 같이 충신 최양(崔瀁)의 공적을 빛 내기위하여 그의 호를 따라 후손들이 만육(晩六) 자손이라부르고 있다.

1세조(一世祖) 묘소(墓所)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신원리 대승동 산 20번지 에 시조 문충공 최군옥(崔群玉)을 비롯하여 2세 龜年. 3세 希平. 4세 柔. 5세 善能. 6세 돈. 6세 七夕. 7세 贄. 의 산소를 단으로. 8세 만육공 (崔 瀁)내외분의 묘소를 모시고 매년 3월 15일(음)에 전국의 후손들이 운집하여 향사를 모시고 있으며.

9세 도승지공(崔進明) 10세 군수공(崔汝寧) 도사공(崔汝貞)은 김제시 금구면 청도리 산 55번지 (3월16일{음}향사)에. 현감공(崔汝寬)은 8세 만육공 선영하 (3월15일{음}향사)에. 판서공(崔汝達)은 임실군 지사면 계산리 산85번지 (3월20일{음}향사)에. 그밖의 다른 선조들의 묘소도 근방에 모셔져 있으니 각 지파별 로 3월20일까지 연이어 향사를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