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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맥 문열공계 > 소개 > 인맥
문열공계 연원
1세조
본관 전주
종가와 세거지
인맥

인맥(人脈)

문열공(文烈公) 최순작(崔純爵)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長子)는 고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예종(睿宗) 때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한 최숭(崔崇)이요, 차자(次子)는 고려 인종 때 개성소윤(開城小尹)을 지낸 최공(崔崆)이다. 문열공(文烈公)의 6세손 최득평(崔得枰)은 통헌대부선부전서(通憲大夫選部典書)를 역임하였고 남달리 불교(佛敎)에 귀의(歸依)하여 불도(佛道)에 진력했다. 공의 장자 최재(崔宰)는 고려사를 통해 강직하기로 이름 높았던 인물. 공은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 중부령(中部令)을 거쳐 지평(持平)이 되었다. 충목왕(忠穆王) 3년 도(道)의 양전(量田)이 실시 될 때 판관(判官)에 임명됐으나 전왕(前王) 때의 잘못을 실무자가 다시 파헤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개탄하며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이어서 전법정랑(典法正郞), 지흥주사(知興州使)가 되고 전객부령(典客副令)에 등용되었다. 성산군(星山君)과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전임되었으나 모두 사양 대율리(大栗里)에서 여생을 보냈다. 후에 완산군(完山君)에 제수되었고 문정(文貞)이란 시호(諡號)를 받았다.

고려말(高麗末) 조선초(朝鮮初)를 살면서 벼슬을 않고 방랑하던 학자(學者), 목은(牧隱) 이색(李穡)도 그 청백(淸白)을 깊이 사랑했던 나머지 시를 써 노래하기까지 했다. 목은(牧隱)은 완산군(完山君) 최재(崔宰)의 문하생(門下生)으로 선생의 높은 뜻을 노랫말로 썼는데. 그것이 제삼시(第三詩) 「기최선생삼수(器崔先生三首)」라 해서 「전주최씨세보수편(全州崔氏世譜首篇)」에 기록되어 있다. 그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늙을수록 맑은 마음 고절(苦節)은 노래(老來)에 더욱 강하다. 도(道)와 같이 자란 몸은 철(鐵)심장 같고 명망은 주석(柱石)이 될 만하도다…….” 목은(牧隱)은 완산군(完山君) 최재(崔宰)의 청백(淸白)을 철(鐵)과 주석(柱石)으로 비유해서 노래했다. 즉 철(鐵), 석(石), 간장(肝臟)의 신념(信念)으로 나라의 주석지신(柱石之臣)이었음을 말한 것이다. 문정공(文貞公) 최재(崔宰)는 세 아들을 두었으니 장자는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낸 최사미(崔思美)요, 차자(次子)는 삼사좌윤(三司左尹) 최덕성(崔德成), 삼자(三子) 참찬의정부사를 지낸 최유경(崔有慶) 등이다. 전주최씨 자손이 크게 벌족(伐族)을 이루면서 상신(相臣), 대제학(大提學), 청백리(淸白吏) 모두가 최유경(崔有慶)의 자손에서 나왔다.

최유경(崔有慶)은 아호(雅號)가 죽정(竹亭)이다. 공은 한때 진천(鎭川)에서 살았는데, 초평(草坪)땅에 가면 죽정(竹亭)내가 있는데 이곳이 죽정(竹亭)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은 공의 아호를 딴 것이다. 죽정(竹亭)은 공민왕 21년 나이 29세에 이미 판도좌랑(版圖左郞)에 올랐으며 이어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승진되었다. 죽정(竹亭)은 마음이 청백(淸白)하고 비리(非理)를 용서치 않았다.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때는 환관(宦官, 내시) 윤충좌(尹忠佐)가 매관매직을 일삼고 방자함에 이를 탄핵, 유배(流配)시키기도 했다. 공(公)은 우왕 1년 나이 32세에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에 올랐으며 요동정벌 때는 서북면안렴사(西北面按廉使) 겸 운량사(運糧使)가 되고 최영(崔瑩)이 실각한 후 밀직부사상호군(密直副使上護軍)에 올랐으며, 1392년 이조(李朝)에 들어와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올랐다. 이외 여러 벼슬에 올라 청렴결백을 일생의 지표로 삼아 청백이(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고 청주(淸州)의 송천서원(松泉書院)에 배향되어 많은 사대부(士大夫)들이 공을 흠모하고 있다.

국보(國寶) 제1호 서울 숭례문(崇禮門)의 상량문(上樑文)이 죽정(竹亭)의 글씨로 판명된 것은 근래의 일이다. 숭례문을 수리하던 중에 이 상량문이 발견되어 죽정의 친필임을 확인한 바 있다. 숭례문은 태조 7년 1398년에 준공되었는데 당시 죽정은 경기도도관찰사(京畿道都觀察使)로서 숭례문 건축의 책임을 맡았다. 공(公)은 효(孝)로써 정려(旌閭)를받았으면서, 조정에 나가서는 성(誠)과 충(忠)으로써 생을 일관한 인물(人物)이었다. 후에 평도(平度)라는 시호(諡號)를 받아 자손들은 평도공파(平度公派)라 한다. 공은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1자(子) 사위(士威)=한성판윤공파(漢城判尹公派), 2자 사의(士儀)=양도공파(襄度公派), 3자 사규(士規)=지평공파(持平公派), 4자 사강(士康)=경절공파(敬節公派), 5자 사용(士庸)=첨추공파(僉樞公派), 6자 사흥(士興)=감무공파(監務公派) 등인데 이 여섯 아들은 조선조(朝鮮朝)의 중추적 인물들이다. 판돈녕(判敦寧)을 지낸 양도공(襄度公) 최사의(崔士儀)는 종친부(宗親府)를 오래도록 관장했고, 중군총제인수부윤(中軍總制仁壽府尹)과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다시 경기감사(京畿監司)와 개성유수(開城留守), 판한성부윤(判漢城府尹)을 지냈다.

우찬성(右贊成)에까지 오른 경절공(敬節公) 최사강(崔士康)은 충직(忠直)함을 인정받아 이왕가(李王家)와 인척(姻戚)관계가 두터워 성녕대군(誠寧大君, 태종의 子)과 금성대군(錦成大君, 세종의 子)에게, 손녀는 임영대군(臨瀛大君, 세종의 子)에 출가시켰다. 후에 최사강(崔士康)은「경절(敬節)」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공의 7대손이 되는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은 전주최씨의 대표적 인물로 인조반정(仁祖反政)에 가담, 정사공신 일등(靖社功臣一等)에 올라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지고 이조정랑(吏曹正郞) 참의(參議) 등을 차례로 역임했다.

인조(仁祖) 3년 39세에 부제학(副提學)이 되어, 대동법(大同法) 시행이 재론되자 그 선행조건으로 호패법(號牌法) 실시를 주장, 호패청 당상(堂上)이 되었다.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왕을 강화(江華)로 호위하고, 강화(講和)를 주장, 화전(和戰)이 성립되어 이듬해 후금(後金)을 물러나게 하고 경기도 관찰사, 병조참판(兵曹參判), 우참찬(右參贊), 호조판서(戶曹判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난 것은 지천(遲川)의 나이 50세 때.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을 때 척화론(斥和論)에 대해 공허한 명분보다 종사(宗社)와 민족을 구하는 것이 제1의 명분이므로 강화(講和)를 해야 한다고 주장. 그는 수차에 걸쳐 적의 진영을 왕래, 강화에 필요한 조건을 타진했고, 주화론(主和論)을 초안했다. 그 이듬해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이 되었고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심양에 가서 포로가 된 척화신(斥和臣)과 조선인(朝鮮人)의 석방을 교섭하기도 했고, 한때 명(明) 나라와 내통하여 정권을 복구(復舊)하자는 계획(소위 회천대업(回天大業))이 밝혀져 심양에 3년간 구금(拘禁)되기도 했다. 심양에서 돌아온 지천공(遲川公)은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어영청도제조(御營廳都提調)를 지냈다. 지천공(遲川公)은 양명학(陽明學)에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글씨를 잘 썼다.

지천공(遲川公)의 형이 되는 최래길(崔來吉)과 아우 최혜길(崔惠吉)도 당대를 울린 인물로 기록되었다. 최래길(崔來吉)의 호는 이재(頣齋)로 광해군(光海君) 3년 문과(文科)에 급제 전예(典藝)를 지내고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이 되고 뒤에 영흥부사(永興府使)를 지냈다. 이재공(頣齋公)은 병자호란 때 왕을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호위했으며 벼슬은 공조판서(工曹判書)에까지 올랐다. 뒤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공의 아우인 최혜길(崔惠吉)은 호(號)를 류하(柳下)라고 했으며,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 나라에서 내리는 공신(功臣) 책록을 사양하고 후에 동지사 겸 세폐사(冬至使兼歲幣使)로 청(淸)나라에 다녀와서는 대사성(大司成) 이조참판(吏曹參判) 등을 지냈으나 그는 평생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다. 지천공(遲川公)의 양명학(陽明學)은 그의 손자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에 와서 화려하게 꽃피웠다는데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은 지천공(遲川公)의 손자이며 최후량(崔後亮)의 아들이다. 초명은 석만(錫萬), 자(字)는 여화(汝和)라고 했다. 응교(應敎)를 지낸 최후상(崔後尙)에 입양(入養), 일찍이 유명한 남구만(南九萬), 박세채(朴世采)의 문하생이 되었고, 현종(顯宗) 7년 20세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25세 때 정시문과(庭試文科),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 설서(說書), 봉교(奉敎), 교리(校理)를 역임했다.

숙종(肅宗) 1년, 39세에 부제학(副提學)에 올라 당시 송시열과 다투었던 윤증(尹拯)을 변호하고 김수항(金壽恒)을 논척하다가 파직되기도 했다. 명곡공(明谷公)은 혼천의(渾天儀)를 수리하는데 참여하기도 했으며 좌의정(左議政) 때는 국조보감속편(國朝寶監續編), 여지승람(輿地勝覽)의 증보(增補)를 상소, 이를 실현케 했으며 서양의 고등수학보다 1백년 앞선 「구수략」의 고안자이다. 명곡공(明谷公)의 아우 손와(損窩) 최석항(崔錫恒)도 이름을 날린 인물이다. 그는 경종조(景宗朝)에 소론(少論)의 원로(元老)로 이른바 「소론4대신(少論4大臣)」의 한 사람이다.

약관 24세에 진사가 되고 26세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30세에는 정언(正言)이 되었다. 이어서 경상감사(慶尙監司), 개성유수(開城留守), 평안감사(平安監司) 등을 거쳐 54세 때에는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다. 말년에 우의정(右議政)에 오르고 69세에는, 실록청재관(實錄聽裁官)으로 숙종실록(肅宗實錄)의 편찬을 주재하고 그 이듬해 좌의정(左議政)에 승직하였으나 재직 중 세상을 떠났다.

명곡공(明谷公)의 자(子) 최창대(崔昌大)는 당시 사림(士林)의 촉망을 받은 유학(儒學)의 대가(大家). 공(公)은 호를 곤륜(昆崙)이라 했으며 25세에 별시문과(別試文科)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 설서(說書),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30대의 젊은 나이에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었다. 이어 교리(校理), 이조좌랑(吏曹佐郞), 헌납(獻納), 응교(應敎)를 거쳐, 35세에 사서(司書),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내고, 45세에 대사성(大司成)에 승진,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가 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뒤에 다시 이조참의(吏曹參議), 부제학(副提學) 등을 역임했으며 제자백가(諸子百家)와 경서(經書)에 밝아 사림(士林)의 으뜸이 되었으며 부친의 학문을 계승하여 문장(文章)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다. 「곤륜집(昆崙集)」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