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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인사말|화수회는|연혁|조직도|역대회장|역대임원|회칙(종약)|화수회 기장|종훈|전주최씨 계열|찾아오시는 길
 역대회장 화수회 소개 > 역대회장
         
初代 會長1950년 자유당 초기에 농림부장관을 역임한 분으로 양도공파 후손이다. 장관재임시 태섭, 주호, 보혁회장 등 10여명의 기업인들이 전주최씨일가 모임으로 돈독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던 이분들이 주축이 되어 전주최씨 서울 화수회가 창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초대회장에 당시 농림부장관이었던 圭鈺일가를 선출하여 그 첫모임으로 청량리 홍능 임업시험장 숲속에 신문광고를 보고 모인 전주최씨 1백여 명이 창립총회를 가진것이다. 이후, 신병치료차 미국으로 간 후, 작고했다는 소식 후로는 아직까지 그 자손들과 연락이 안되고 있다. 그의 사진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다가 결국 농림부에 찾아가 사정하여 사진을 구하게 되었다.
崔 圭 鈺(襄度)
 
第二代 會長유리업계의 태두 (주)한국유리공업을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태섭 회장은 북한 철산 출신으로 첨추공파 후손이다. 제2대회장에 취임하면서 화수회는 더욱 활성화되고 태섭회장의 남다른 숭조 애족의 정신이 모든 종사에 큰 힘이 되었다. 회사경영에서도 말단 사원에서부터 간부진까지 상하를 구별하지 않고 모두가 한식구요, 전부 주인임을 강조하면서 몸소 작업차림으로 똑같이 생활하므로 근래 어려운 시기에도 노사분규가 없는 모범기업으로 손꼽는다. 그러나 인생의 무상함은 어쩔 수 없이 지난 98년 6월에 지병을 이기지 못하고 87세를 일기로 타계하시니 전주 최문은 물론 국내 경제계의 큰 별을 잃었다. 후손 자녀들의 종중 참가를 기대한다.
崔 泰 涉(僉樞)
 
第三代 會長사범학교를 나와 초등학교 교사, 고등고시를 패스한 상진회장은 일찍이 검사로 임용, 법조인이 되어 최문을 빛내었다. 정년 후 변호사 개업을 하고 제3대 회장에 선임 된 후 일가들의 법률상담 역할까지 담당하는 따뜻한 분이었다. 전남 담양출신인 그는 문성공의 넷째 중랑장공파 후손으로 안타까운 것은 현재 30년이 지나도록 상진회장의 자손들과는 연락이 두절되었다. 근래에 그의 따님인 민자씨의 연락을 받고 반가웠으며 아버지의 사진을 들고와 본회에 게시하게 되었는데 당시 총무였던 재덕고문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그의 아들들은 청주시에 살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후손들의 연락처나 주소지를 찾고 있다.
崔 尙 珍(中郞將)
 
第四代 會長전북 부안 출신인 병용회장은 중랑장공파 소윤공 후손으로 육척거구에 당당한 체구가 당시 경찰계의 위엄과 똑같았다. 경기도와 전남도경국장으로 당시 6.25 직후의 어지러운 치안을 평정한 공로와 갖가지 일화가 그를 연상케한다. 정년 후 제4대 회장을 맡아 회원확보에 주력했으며, 최문에서는 보기 드문 담대한 분으로 일가들의 호평을 샀으며 이도 역시 현재까지 그의 가족들과 연락이 두절되어 사진을 구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타계 한 후 더욱 소식이 묘연하여 고향인 부안에 선산이 있는 것으로만 확인하였다. 병용 회장의 연락처도 묘연하여 결국 서울경찰청에 부탁하여 사진을 구하게 되었다.
崔 秉 用(中郞將)
 
第五代 會長현직, 국회의원의 신분으로 제5대회장을 맡아 그의 정치수완을 발휘한 시점이 화수회로 발돋움한 절정기였다. 그는 화수회는 정치인보다 기업인이 맡는 것이 적임이라는 명분으로 1년만에 총회에서 전격적으로 주호 회장에게 회장직을 떠넘기는 수완을 발휘하였다. 유일하게 1년 재임한 재구 회장은 경남 고성 출신으로 문성공의 장자 안렴사공파 후손이며 선친 우당공에 이어 4선의 영광을 안은 거물급 정치인으로 민주자유당 상임고문으로, 화수회 고문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현직으로는 한국산업은행 이사장으로 재직중이다. 화수회 총회에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꼭 참석하여 일가들의 환호를 받는다. 쾌활한 활동으로 건강해 보였으나 결국 지병에 못이겨 그의 나이 육십 성상에 타계하였다.
崔 載 九(按廉使)
 
第六代 會長주택건설의 태두 (주)우성건설의 주호 회장은 전북 임실 출신으로 중랑장공파 후손이다. 제6대 회장에 취임하자 그는 각파조 묘소 순례 참배 행사를 했으며, 서울 화수회와 별도로 전국 화수회를 창립하여 각 시, 도, 군 화수회 조직으로 3십만 전주최씨 일가들을 한묶음으로 조직을 했으며, 회보를 창간, 홍보에도 큰 성의를 표하였다. 그는 16여년 동안 서울, 전국 화수회를 맡아 창립 이래 최대한의 활성화를 기하는데 열의가 대단했다. 이제 8십이 훨씬 넘은 고령으로 모든 사업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이선에서 그가 설립한 장학회에 몸담고 있다. 천년을 살고 대대손손 건강을 물려주겠다던 주호 회장, 그도 역시 팔십이 넘어 구십이 가까워 노령을 이기지 못하고 타계하였다.
崔 主 鎬(中郞將)
 
第七代 會長1997년 8월 補赫 회장의 서거 소식을 접한 전주최씨들은 큰 슬픔이었고 문중의 큰 별이 떨어지는 충격이었다. 제7대 화수회장에 취임한 그는 화수회가 사무실 하나 없이 보따리 살림을 해서야 되겠느냐고 하면서 1천만원을 쾌척하므로 현재의 사무실 얻는데 초석이 되었으며 장차 회관 건립의 견인차가 될 것이다. 평도공파 종중의 많은 종사가 그의 힘이 컸음은 말할 나위 없으며 일가들의 어려운 일이라면 세심한 관심으로 돌보는 따뜻함이 그를 더욱 그리웁게 한다. 보혁 회장은 전북 김제 출신으로 첨추공파 후손이다. 그의 고향 김제 어귀에 도수당조의 신도비도 그가 큰 힘을 보탰으며 화수회나 종중은 그의 업적을 길이 보존키 위하여 용인, 효렴사 앞에 공적비를 세웠다.
崔 補 赫(僉樞)
 
第八代 會長의학계에서는 최초로 한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석근 회장이 제 8대 회장에 취임했다. 그는 육사 8기생으로 5.16후 고향인 충남 연기군수를 역임했으며, 원효로 천일한의원을 개업하여 한의사로서 명성을 떨쳤다. 석근 회장은 양도공파 후손으로 임기 2년씩 두 번 연임하여 4년간 화수회를 이끌어오면서 당시 서울과 전국 두 개의 조직으로 분리 되었던 화수회를 통합하여 중앙화수회로 단일화 하는데 힘썼으며, 군출신답게 패기와 절도있는 운영으로 매사가 매끄러웠다. 그도 노환을 이기지 못하고 68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치시었다. 그가 돌아가시자 가족들은 어디론가 뿔뿔이 헤어져 버리고 지금은 화수회와도 연락이 끊긴 상태다. 대단히 안타까운 마음 이를 데 없다.
崔 錫 瑾(襄度)
 
第九代 會長전국과 서울 화수회가 단일화 되면서 중앙화수회로 발족, 첫 회장의 영광을 윤홍 회장이 취임하므로 제9대가 된다. 온화한 성격에 세심한 운영이 3년의 임기가 원만했다. 한약재 수출입업으로 크게 성공하여 (주)조양물산을 일으켜 오늘의 대기업주로 발돋음 하였다. 전북 정읍이 고향이며 중랑장공파 후손으로 남달리 숭조사상이 투철하여 위선의 정성도 크신 분이다. 고향의 정읍에 자신이 다니던 모교에 장학금을 내놓고 매년 우수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반면, 중랑장공파 종중회를 서울에 조직하여 친목을 돈독히 하면서 숭조애를 기르자는 제안을 누차 화수회에 하고 있으면서 대단한 관심과 성의를 쏟고 있다. 또 선영의 묘를 최고의 명당자리에 잡아 가계의 위복을 빌고 자손만대 번영을 기원하는 숭앙의 모습이 대단하다.
崔 潤 洪(中郞將)
 
第十代 會長제10대 회장은 경절공파 후손이요 충북 음성 출신인 익주 회장이 취임했다. 익주 회장은 화수회 부회장으로 15여년간 힘쓰시다가 이번에 전 일가들의 추천으로 회장에 올랐다. 그는 숭조사상은 봉사정신에서 우러나온다는 신조로 지금도 신당 적십자 학교를 자비로 운영하고 있으며, 고향 음성에는 직계선조님의 묘역정화는 물론 열녀 제각을 지어 후손 대대로 귀감 되도록 하는 위선사업이 돋보인다. 이제 8십이 가까운 고령에 남길 것이 무엇인가를 노심초사 하면서 여덟 번 정승자리에 오른 명곡 할아버지의 문집을 정리, 번역하여 후대에 물려주는 것이 최대의 희망이라고 했다. 그래서 명곡할아버지 친필을 복사하여 병풍과 액자를 자비로 표구하여 종중과 화수회에 기증하는 위선을 했다.
崔 翼 周(敬節公)
 
第十一代 會長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예편 후 고향인 전북 부안에서 몇 번의 출마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98년 6월 지방자치선거에서 당당히 부안군수로 당선된 규환 회장이 제11대 회장이다. 그가 회장을 재임하는 동안 고향인 부안에서 무엇인가를 꼭 이루워 보겠다는 신념에 일가 어른들은 격려를 보냈고 자신은 항시 머리 숙여 감사함과 성공하며 보답하겠다는 말로 일가끼리의 화수회 운영은 더욱 돈독하였다. 회의 때마다 육사출신이요 정치인답게 만장을 압도하는 달변의 솜씨가 부안군의 행정을 도맡아 선정을 하는데 힘썼다. 그러나 이후 몇 번의 재기의 기회를 노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조용히 고향에서 지낸다. 지금도 일가들의 정을 잊지 않고 총회 때나 각종 문중 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하여 격려해 주는 열렬함이다.
崔 奎 煥(中郞將)
 
第十二代 會長충남 공주시 정안면 활원에 과거 삼남지방 유생들이 모여 시와 문학을 강론하던 문회당(文會堂)이 있다. 이곳이 바로 동규(東奎) 회장의 출생지이고 양도공파이다. 선비의 고장, 효의 상징, 오효자로 유명한 집안 출신인 동규 회장은 본회 부회장을 15여년간 역임했으며 평도공파 대종증회 상임부회장, 양도공파 종중회장 등 그가 없는 종중은 있을 수도 없었고 없어서는 안 될 인물로 정평이 난 분이다. 그도 이제 8십이 가까운 고령에 화수회나 문중에 마지막 봉사로 생각하면서 중앙회 회장에 취임하여 3년의 임기를 마치고 이제 종중이나 화수회에 할 일을 다 할 것 같은 홀가분한 심정이라고 하면서 조용히 친구도 만나고 옛날의 추억을 되새기면서 여생을 보내는 듯했으나 그도 역시 고령을 이기지 못하고 2007년 하절기에 타계하셨다.
崔 東 奎(襄度)
 
第十三代 會長제13대 중앙화수회 회장에 취임한 병섭(秉燮)은 전남 영암 출신으로 중랑장공파 후손이다. 일찍이 전남대학교 약대를 나와 서울 남대문로에서 광장약국을 수년간 운영하고 제약회사를 경영하는 등의 CEO다운 사업적 철학이 다분한 분이다. 남달리 숭조애족의 정신이 강하여 고향의 선산 위선을 독자적인 금전 출연으로 이루는 것이나 중앙화수회 부회장에 참여하면서 사무실의 빈약한 사무기 시설을 보고는 즉시 컴퓨터 구입을 해야 된다고 하면서 일금 2백만원을 쾌척하여 화수회 전산화 업무에 기틀을 잡아 주었다. 그가 취임 할 때에 「한 뿌리 한 줄기 잎새들이 바로 여기 모이신 일가님들」이라고 하면서 훌륭하신 조상님의 후손답게 슬기로운 마음과 깨끗한 정신으로 사회생활에 임한다면 타에 뒤지지 않는후손이 되는 것은 당연지사」임을 강조하는 최씨다운 기백이 넘쳐났다. 병섭(秉燮)회장은 항시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청백리와 대쪽같은 강인함이 우리의 긍지」라고 회의 때마다 역설한다. 그의 힘찬 추진력과 재력의 바탕이 겸비했으면 당시 화수회는 큰 발전이 있었을 것인데 여의치 못했음이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다. 서울의 송파구에 다시 약국을 열고 국민 보건 향상에 매진하는 병섭회장에게 우리 일가들은 박수를 보낸다.
崔 秉 燮(中郞將)
 
第十四代 會長경기도 화성시 오산이 고향인 병길(炳吉) 제13대 회장은 평도공 할아버지의 셋째 아드님이신 지평공(휘 사규)파 후손이다. 한양대학교 경영대학원, 서울대 행정대학원 등을 수료하고 산업발전의 동맥이라 할 수 있는 철도청 이사관급에서 철도청 설계사무소장, 철도 건설국장 등 굵직한 철도청 요직을 거친 뛰어난 실력가로 당시 철도 건설계획의 1인자로 불렸다고 한다. 정년이 되어 사회에 나와 보니 그동안 선조님의 향사나 종중일에 소홀했음을 직감하고 화수회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임기 당시는 유신설계공단 상임고문으로 비교적 시간 여유를 찾았다. 용인 청주 시향을 참례하고 차분하게 종사를 익히면서 화수회 이사에서 부회장을 수년간 역임하다가 2004년 제14대 중앙화수회 회장에 취임하여 3년의 를 마치고 나니 이제 80 성상을 넘긴 고령이 되었다. 항시 근엄한 자세와 묵직한 인품은 종친간의 유대가 두터웠고 화수회 운영에 물심양면의 도움이 큰 힘이 되고 있는 한편 그가 남긴 선조 유적지 탐방 행사는 두고두고 남을 업적이라고 모두가 입을 모은다.
崔 炳 吉(持平公)
 
第十五代 會長「가문의 영광으로 열심히 하겠다」는 첫 인사로 취임한 제15대 경선(庚仙) 회장은 경기도 남양주 금곡 출신인 중랑장공파 후손이다. 덕수상고와 고려대 경제학과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연구과정을 수료했다. 대한상공회의소 공채모집에 수석으로 합격, 경제계에 첫발을 디뎠다. 언론계에서도 경제통으로 매일경제신문 논설위원으로 탁월한 경제논리로 재계의 관심을 끌었다. 1999년 경기도 정무부지사로 발탁되어 경기도의 경제활성화에 큰 역할을 하면서 크게 여론을 압도했다. 남양주 금곡의 선산에 모신 20여 기의 묘를 납골당으로 개조하여 선조님의 평안을 도모하는 한편 시간여유 없었던 공직을 떠난 후 이제는 종사에 봉사하고 일가 모임에 참여해야겠다는 신념이 중앙화수회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선친(故在德公)의 유지가 너무나 귓전을 맴돌았고 화수회에 나오면 선친께서 하셨던 지나간 일들이 생각나게 되는데 감회가 깊었다고 한다. 그가 제15대 중앙화수회장이 되면서 「가문의 영광으로 열심히 하겠다」는 인사에 모든 일가들은 감동했고 화수회 운영도 현대적인 취향을 찾아 모든 업무를 전산화한 사이버 시스템 구축으로 먼저 홈페이지 개설을 했으며 조직이나 통지문 등도 이메일로 보내는 등 빠르고 간편한 업무추진으로 그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崔 庚 仙(中郞將)